일본 제국 해군

 




'''대일본제국 해군'''
'''大日本帝國海軍(だいにっぽんていこくかいぐん
Imperial Japanese Navy('''IJN''')'''

'''해군기'''[1]
'''존속기간'''
1872년 ~ 1945년
'''명령 체계'''
대본영
'''병종'''
해군
'''해군가'''
군함행진곡(軍艦行進曲)
'''국가'''
일본 제국
'''본부'''
해군성 : 도쿄도 고지마치구
'''기념일'''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해전)
'''주요참전'''
중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지휘'''
인물 참조
'''후신'''
해군총대(1945년 4월 25일 ~ 10월 10일)
해상경비대(1952년 4월 26일 ~ 7월 31일)
[image]해상자위대(1954년 7월 1일부터)
1. 상세
2. 역사
3. 상징
4. 군복
5. 조직
6. 해군구
7. 관련 인물
11. 일본 해군이 보유했던 군함 목록
12. 참전 이력
13. 관련 문서

[clearfix]

1. 상세


일본 제국 시절의 해군. 정식명칭은 대일본제국해군(大日本帝國海軍)이다. 전후 해상자위대가 욱일기와 주요 간부진을 그대로 계승[2]했다.
최고통수권자는 육군과 마찬가지로 천황이였으며 내각에는 권한이 없었다. 그 아래로는 군정권은 해군대신, 군령권은 군령부총장, 실전부대 지휘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담당하는 일종의 과두제 구조였다. 1930년대 당시 셋의 위상은 복잡했다. 해군대신이 명목상 서열이 높았다고는 하지만 황족인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가 군령부총장 재임시기 군정권에 해당하는 '''병력량 결정권'''을 군령부로 가져온 이래 해군성은 예산 셔틀로 전락했고, 야마모토 이소로쿠 같은 아이돌이 연합함대를 틀어쥐고 있을 경우는 역시 상급자인 해군대신, 군령부총장도 통제를 못 했다. 이런 기형적 체제는 대전 말기 연합함대 전력이 거덜나면서 군령부의 발언력이 약화되고, 내각총리대신과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경험해본 마지막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가 군령부총장 토요다 소에무를 '''으로''' 누를 수 있게 되고서야 수습되었다. 전시에는 육군과 대본영을 설치했다. 프로이센 육군을 모방한 육군과 달리 일본 해군은 영국 해군을 모방했다. 일본이 섬나라이기 때문에 제해권을 중시하였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으로 잘 알려져있듯 육군과 사이가 굉장히 나빴다. 미국 육군과 해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합동작전을 실시했지만 일본 육해군이 합동전투를 한 것은 과달카날,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레이테 만 해전 뿐이었다. 인원은 해군이 훨씬 적어서 육군보다 복지가 좋았는데, 그 때문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육군에서 많이 느꼈다고. 거기다 해군은 여건이 좋고 기술도 배울 수 있어 입대경쟁이 치열했다. 육군에서는 일부 공병, 그중에서도 전문장비를 다루는 분야가 아닌 이상에야 입대부터 전역까지 소총 한 자루만 닦으며 구르기가 일상이었다. 그에 반해 대부분 해군은 어마어마한 기관부 혹은 그에 준하는 기계장치들을 다루는 것이 일이며, 해군에서 막일꾼으로 취급받는 갑판병조차 페인트 도색 등 선박 유지/보수 기술을 익힐 수 있고 전역시 민간에서도 꽤 쓸모 있는 것들이다. 남들이 육군에서 구를 때 해군으로 들어온다면 공짜로 기술을 배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사회 그리고 현재 21세기의 중진국 혹은 개발도상국에서도 징집병으로 배워온 운전, 정비, 항해 등의 기술로 평생을 먹고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엄청난 메리트다. 물론 당시 사람들이 전부 이러한 인식이 있는 만큼 경쟁률은 어마어마해 대거 주로 엘리트~준엘리트들이 뽑혀가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이는 해군의 선민의식과 귀족화에 한 몫을 했다. 이하 참조.
대신 국내 정치에서 입김이 강한 것은 육군이었으니 해군도 아쉬운게 있기는 하다. 전통적으로 일본 육군은 러시아(소련)을 가상 적국으로 판단했지만 해군은 미국을 가상적으로 판단했다.
출신 학교와 학교에서의 성적을 따지는 철저한 학력 절대주의 집단이었으며, 해군의 특성상 외국인과 접할 기회가 많다보니 서양인들에게 무시받지 않기 위해 해군 장교들에게는 상당한 수준으로 교양을 가르쳤던 것이 특징. 그 덕분에 해군의 장교들은 사회 상류층 이상으로 교양을 쌓은 이들이 일반적이었고, 일본 제국 신민들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는 해군 내부의 파벌다툼으로 인해 인사 정책이 우왕좌왕할 가능성을 막을 객관적 인사 기준이 학교 성적뿐이었기 때문이고, 육군에 비해 수가 적었기에 1인당 교육비를 더 많이 지출할 수 있었던 덕도 있었다.[3]
또한, 비록 병과사관에 비해 무시되는 면이 없지 않았으나, 비병과사관들인 주계과, 군의과, 기술과, 법무과 등으로 임관하는 2년제 단기사관 대우가 육군 동 병과 대비 매우 좋았다. 병과가 아니면 장교 취급도 못 받았다 같은 건 사병들의 뒷담화 내지는 지휘 계통에서의 배제 등이었지, 일단 자기 계급에 맞는 의전은 확실히 받았고 전투 쪽으로는 무시당했을지언정 자기 특기인 전문 분야 쪽으로는 병과 사관들도 영역을 존중해 주는 편이었다. 아예 병과 사관들과는 반쯤 별세계 사람처럼 여기며 지내는 편이라, 한두 계급 정도면 병과와 비병과 사관들끼리 상호 존대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명문대 출신 고학력자나 정치 및 경제계의 유명 인사의 자제 등이 해군으로 몰리는 효과도 있었고, 이들이 전후 일본의 정계 및 제계에 대거 진출하며 해군을 좋게 평가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삐딱한 엘리트 의식을 낳아 경직되고 폐쇄적인 조직체계가 갖춰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일단 군내부에서의 지위와 대우는 오로지 학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실제 능력은 그 다음 문제. 또한 장교들이 엘리트 의식에 빠진 탓에 사병들은 장교로 진급을 할 수 없었다. 경력이 오래되고 능력 있는 사병들을 그대로 수병, 하사관에서 썩게 만드는 것은 전력손실이라는 이유로 제도가 개편되긴 했는데, 그렇게 생긴 것이 특무사관이라는 특별 계급이다. 하사관에서 능력 있는 인물들을 특무사관으로 진급시켜 특무소위~대위로 임관하여 장교 취급을 해주긴 했는데, 사실상 형식적인 것이었다.
계급장부터가 한 눈에 봐도 일반 위관급 사관과는 구분되도록 디자인 했고, 아직 부임조차 하지 않은 일본해군병학교를 갓 졸업한 견습사관의 지휘권이 특무대위보다 위에 있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장교들로부터도 같은 급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차라리 병조장으로 남는 게 나을 정도였다. 이러다보니 하사관들은 스트레스로 인해 수병들을 상습적으로 폭행했고, 장교 계급 외의 군기는 상당히 막장이었다.[4] 결국 1942년에 기존 특무사관들을 전부 일반사관으로 편입시키고 제도 자체를 폐지, 사병 출신들이 사관이 될 수 있는 길을 아예 막았다. 소좌로의 진급도 특무사관 출신들은 거의 막혀 있어서 해체시까지 특무 출신 소좌는 불과 수십 명, 중좌는 한 자릿수에 불과했고 대좌 이상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이렇게 바늘구멍 수준의 진입 장벽 탓에 의외로 특무 출신 좌관급들은 "그 특무 출신에서 소좌를 달 정도면 인정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 주변에서 진급에 대해 불이익은 있을지언정 다른 의미로 존경과 대우는 받았다고 한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보급의 중요성 자체는 이들도 알고는 있었고 잘 갖춰진 기지에서의 보급은 일본의 경제사정에 비해서 제법 괜찮은 수준이었다.[5][6] 하지만 그것도 영미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었고, 당장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물자를 제때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은 떨어졌다. 거기에 더해서 나치독일의 동맹으로서 기여는 영미보다 미미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과는 달리 상당히 활약했는데 태평양 전쟁 중반까지는 미 해군과 그럭저럭 호각으로 싸울 수 있었다.
실제로 개전시 일 해군의 전력은 영국과 미국에 이은 3위였고, 전쟁 초반에는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해군의 전함 상당수를 전열에서 이탈시키면서 잠시 동안 미국보다 전력이 강해지기도 했다. 1941년 기준으로 총톤수를 비교하면 일 해군이 18만 톤으로 진주만 공습 때문에 13만 톤까지 떨어진 미 해군보다 우세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도 전략적 능력의 부재, 국력의 차이 등 이유로 미국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물론 이런 문제는 따지고 보면 해군 하나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일본 제국이라는 나라 자체의 상대적 후진성에 기인하는 면이 크다.[7]

2. 역사


굳이 기원을 따지자면 도쿠가와 막부 휘하의 수군일 것이다. 막부 수군은 1853년에 이양선이 나타나자 해군으로 정비하였다. 재래식 군선으로 모양새를 갖추긴 했지만 쿠로후네(黑船)를 당할 바는 아니었다. 쿠로후네 사건으로 1854년 강제개항을 하자 도쿠가와 요시노부 근대적 해군이 필요함을 절감, 1866년 대규모 군제 개혁을 실시해 해군 봉행을 설치하고 해군 총재를 뒀다.
당시 일본엔 막부 말고도 각 번에서도 해군력을 조직했는데, 막부 해군은 영국에서 고문단을 초빙해 본격적인 해군을 양성하려고 하였고 동아시아에서 규모도 가장 컸다. 그러나 막부 해군은 제대로 세워지기 전에 대정봉환으로 신정부에 흡수되었다. 1870년엔 육군과 해군이 분리되고 도쿄 츠키지[8]에 해군성을 설치했다. 초기에는 사쓰마[9]가 주도했으며 1876년에 일본해군병학교가 세워진다. 서남전쟁으로 사쓰마가 밀려나면서 일본군 내부에서 육군 중심주의가 강해진다.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도 했다.
청일전쟁은 풍도 해전으로 시작되었으며 황해 해전과 웨이하이웨이 전투에서도 이홍장북양함대에게 크게 이겼다. 자세한 내용은 청일전쟁/해군 전투력 비교 참조. 대규모 승전은 러시아 해군 발트 함대를 궤멸시킨 러일전쟁쓰시마 해전이 대표적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국의 요청으로 칭다오에 있던 독일 아시아 함대 추격전에 나서기도 했으며 지중해에서 수송선 호위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U-27을 비롯한 독일 제국 해군U보트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잠수함들에게 피격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칭다오 공격 당시 영국군과 협조하여 독일 해군이 방어하던 칭다오 항 봉쇄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과 협력, 태평양에서 일본 해군은 활동을 개시하기도 하였다.
1941년에는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진주만 공습의 대성공으로 상당수의 미 태평양함대 전함들을 전열 이탈시킨 일본 제국 해군은 필리핀을 비롯한 서남태평양 등지를 휩쓸며 전쟁 초반 연합국에 우세를 점했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4척이 침몰한 것을 시작으로 연이은 미 해군과의 해전에서 패배하며 제해권을 상실했고, 끝내 1945년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해군성은 제2복원성으로 불린다. 육군과 달리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일본이 저항하느라 연안에 기뢰를 잔뜩 설치해뒀고 이를 제거할 소해부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해상보안청이 이 임무를 위해 1만 명 규모로 유지됐고 1952년에는 보안대란 이름으로 해상자위대의 전신이 해상보안청에서 분리되었다. 사실상 해상자위대는 일본 해군을 계승했다. 그것도 과거의 악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해군병의 복무기간은 3년, 해군 지원병은 5년이었다.

3. 상징


상징 이미지는 벚꽃, 상징 깃발욱일기를 썼다.
일본 해군 함선 중 순양함, 전함, 항공모함, 포함의 함수에는 일본 제국의 국장이자 일본 황실의 상징인 국화문장(菊花紋章)이 달렸는데, 나무에 진짜 으로 금박을 두껍게 씌워서 금색으로 만들었다. 크기가 상당히 컸기에 금박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그래서 국화 문양을 함수에 붙이는 작업을 한 인원들은 작업 후 금박을 빼돌렸을지도 모른단 이유로 탈의 상태에서 군의관에게 항문까지 검사받았다고 한다.
포함은 국화 문양을 달았다. 크기는 구축함급으로 작지만 포함은 바다의 대사관 역할을 했기에 국내외 고위급 인사가 승선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포함은 톤수만 작을 뿐이지 대좌함장으로 부임하는, 의전서열이 매우 높은 함들이었다. 하츠하루급 구축함 네노히(子日)의 함장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시무슈형 해방함 쿠나시리(国後)에게 '왜 귀함은 본함에 경례를 하지 않는가.' 하고 따졌다가ㅡ 쿠나시리가 국화 문양을 달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사죄하러 쿠나시리에 직접 다녀왔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국화 문양의 상징성과 영향력은 막강했다.
국화문장은 일종의 계급장처럼 통용되었기 때문에 해군에서 급이 낮은 함선 취급을 받았던 구축함, 잠수함 등 소형함은 감히 국화문장을 달지 못했다.
욱일기를 비롯해 구 일본 해군으로부터 많은 것을 계승한 해상자위대는 의외로 국화 문양은 달지 않는다. 덴노는 국가원수이긴 해도 상징적인 존재일 뿐 아무 실권이 없음을 일본국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므로, 군함을 덴노가 '하사'한다는 건 현 일본의 통치 제도 하에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화 문양은 과거 제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현재 일본의 국장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일본 황실의 상징이라는 점도 변함없는 데다, 국화문양이 달린 것은 '일본 황실의 소유' 또는 '일본 황실이 하사한 것'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 현존하는 함선 중 국화 문양이 달린 함선은 요코스카에 기념함으로 보존되어 더는 군함이 아닌 미카사가 유일한데, 이것도 진품이 아닌 플라스틱 모조품이다.

4. 군복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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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병의 복제는 타국 해군과 거의 차이가 없는 세일러복을 기본으로 했다. 세일러복 칼라의 흰줄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3줄이 아닌 1줄이라는 점이 특징이며, 해상자위대에선 두 줄로 늘어났다. 수병들 가운데 헌병 임무를 수행하는 인원과 조종사 교육생인 예과연습생 등은 예외적으로 각각 하사관 및 해군병학교 생도 피복과 유사한 복제를 착용했다.
하사관의 복제는 사관과 유사하나, 동정복인 제1종 군장의 경우 사관들이 단추 없이 후크로 여미는 것과 달리 하정복인 제2종 군장과 동일하게 금색 단추를 쓰는 가쿠란 형태의 상의로 되어 있다.
해군 장교의 제2종 군장은 거의 세계 표준인 영국 해군하쿠란식 하정복을 본따서 만든 것이다. 반면 동정복은 영국 해군의 더블 버튼 재킷이 아니라 1920년대까지 미합중국 해군 장교용 근무복 형태의 재킷을 사용했다. 이 복제가 시대에 뒤떨어진다 하여, 서구 해군과 동일한 더블 버튼 형태로 바꾸려는 개정안이 1920년대에 올라왔으나, 해군 원로로 추앙받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내가 이 옷을 입고 러시아 해군을 이겼는데 어찌 없앤단 말이냐?" 하며 극렬 반대해 무산되고 종전시까지 계속 쓰였다는 일화가 있다. 무더운 남태평양에서 목을 조이는 모직 로먼 칼라 제복은 꽤 더웠을 것이다. 동예복은 더블 버튼 형태의 모닝 코트검정 보우 타이를 착용하는 국제 표준(?)형 디자인이었다.
1943년에는 육상 전투복인 육전의와 디자인이 비슷한 황록색 해/육상 전투복인 제3종 군장이 도입되었고, 기존 제1, 2종 군장은 정복으로만 쓰게 된다. 지팡구 16권 표지의 사관용 3종 군장 육전 소요가 늘어나 함정과 육상에서 함께 입을 수 있는 전용 피복 소요가 제기된 점, 사관용 1, 2종은 옷깃이 목을 감싸는 차이나 칼라 형태라 불편했던 점 등이 도입 사유다. 해군 사관용 3종 군장은 일본군에서 넥타이를 착용하는 몇 안 되는 피복이다.

5. 조직


  • 대본영: 해군성(일), 육군성(일)의 상부기관
  • 해군성: 일본제국의 해군에 군정기관. - 최고사령관은 대원수인 천황이다. 또 내각에 속한다.
  • 군령부: 천황직속의 작전을 짜는 대본영의 기관. - 작전전략과 군사행동, 전시상황에 첩보, 암호제정, 전사편찬
  • 해군성외국: 주된 해군함정본부, 해군항공본부, 해군교육본부, 수로부등 다수의 외국이 있다.
  • 해군장관 직속교육기관은 초급 장교 양성을 위해서는 해군삼교 (항해, 포술, 수뢰를 위한 일본해군병학교, 기관사관을 위한 해군기관학교, 주계사관을 위한 해군경리학교), 고급 참모 양성을 위해서는 해군대학이 있었다.
  • 술과학교: 관할진수부및 교육본부, 해군성교육사에 예속
  • 진수부(鎭守府): 해군의 지방조직. -함정의 보전, 군인군속육성, 내전작전. 진수부 사령장관은 천황이 직례한다.
  • 경비부: 후술과 요항부를 개편한 해군지방조직으로 진수부와 동격이지만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 요항부 : 진수부예하의 지방조직
  • 함대의 사령장관은 천황이 직례한다.
    • 연합함대는 2개함대 이상의 함대인 해군작전의 주력이 된다.
    • 지나방면함대는 연합함대에 비견되는 대함대에서 연합함대에 속하지 않고, 중국대륙에서 해군작전을 개시한다.
    • 해상호위총사령부도 연합함대에 비견되는 버대에서 연합함대에 속하지 않고, 선단호위를 한다.
    • 진수부부대, 경비부부대도 독립된 부대에서 관할하는 해역의 방위를 한다.

6. 해군구


1938년 시점인 해군구의 구역, 군항, 요항목록
'''해군구'''
'''관할 진수부'''
'''육상구역, 해상구역은 동일 진수부의 관할'''
'''해상구역의 관할'''
'''육상구역의 관할''' [10]
'''군항'''
'''요항부'''
'''제1'''
요코스카 진수부
가라후토, 홋카이도, 아오모리, 이와테, 아키타
미야기, 후쿠시마, 이바라키, 지바, 도쿄
가나가와, 시즈오카
아이치, 미에
야마가타, 니가타, '''도치기, 군마
사이타마, 야마나시, 나가노'''
요코스카
오미나토(아오모리)
'''제2'''
구레 진수부
와카야마, 오사카, 효고, 오카야마, 히로시마
야마구치, 도야마, 이시카와, 후쿠이, 교토
돗토리, 시마네, 도쿠시마, 고치, 에히메
가가와
야마가타, 니가타, 오이타
(미야자키[11]), (후쿠오카[12])
아이치, 미에, '''기후, 나라, 시가'''
구레
도쿠야마(야마구치)
마이즈루(교토)
'''제3'''
사세보 진수부
가고시마, 사가,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한반도, 타이완
(미야자키[13]), (후쿠오카[14])
오이타, 미야자키, 후쿠오카
사세보
진해(한반도)
마궁(호코청)
'''관동주'''
사세보 진수부
관동주 및 해상
-
-
-
뤼순커우(관동주)
'''남양'''
요코스카 진수부
남양군도 위임통치구역 및 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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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관련 인물


[image]'''대원수(육, 해)'''
메이지 덴노
다이쇼 덴노
쇼와 덴노
[image]'''해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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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스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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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 오사미
永野修身
고가 미네이치
古賀峯一 ◆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東伏見宮依仁 ◆
시마무라 하야오
島村速雄 ◆
◆ : 사후추서

[image]'''해군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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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세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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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하시 산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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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이 미쓰마사
米内光政
햐쿠타케 겐고
百武源吾
카토 타카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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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기요시
長谷川清
오이카와 고시로
及川古志郎
시마다 시게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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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젠고
吉田善吾
도요다 데이지로
豊田貞次郎
도요다 소에무
豊田副武
곤도 노부타케
近藤信竹
타카스 시로
高須四郎
노무라 나오쿠니
野村直邦
사와모토 요리오
沢本頼雄
엔도 요시카스
遠藤喜一
나구모 주이치
南雲忠一
다카기 다케오
高木武雄
야마가타 마사쿠니
山縣正郷
쓰카하라 니시조
塚原二四三
이노우에 시게요시
井上成美
시오자와 코이치
塩沢幸一
이토 세이이치
伊藤整一


[image]'''해군 중장'''
[image]'''해군 소장'''

8. 편제




9. 해군 육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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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육전대는 해병대 기능도 했다. 일본군에선 초기엔 필요할 때마다 임시로 부대를 설치하는 식으로 운용했지만 1930년대부터는 상설부대로 전환했다. 내부에 공수부대도 설치해서 1942년엔 첫 공수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종전 직전에 인원 규모는 10만 명이었는데 일본군 해군이 워낙에 강한 지휘권을 발휘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뭔가를 수행하진 못 했다. 그 때문에 자위대가 생겼을 때 해병대 기능을 갖춘 부대는 계승되지 않았다. 다만 해군이 아닌 육군인 육상자위대 서부방면대에 직속으로 상륙장갑차를 보유한 보통과연대가 도서 지역의 방어를 위해 해상자위대 상륙함정의 지원하에 상륙작전을 실행하며 2014년 기준으로 이들은 수륙기동단이란 이름으로 확대됐다.
육전대는 해군 장교들 사이에선 좌천되는 곳이었고, 사병들이라고 해서 다르진 않았다. 분위기 험악하기로 유명한 일본 해군 내에서도 똥군기 심한 축에 들었고, 사기도 높은 편은 아니었으나, 육군한테 질수없다 마인드로 인해 훈련은 빡센 편이었으며 그에 따라 해병대의 임무로 돋보이는 활약을 하였다. 1943년부터 조선인을 지원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해군이 이들을 집중 배치한 곳도 육전대였다. 소수의 인원이 기지 경계부대 및 지원부대나 항공부대에도 배치됐다. 해군에선 조선인들의 사보타주 등을 우려, 함선 근무는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45년 광복 이후 건군기(建軍期)에 대한민국 해군이 창설되자 구 일본 해군 출신 인사들이 해군에 합류했다. 그런데 1949년에 해병대가 창설되자 그들 중 대다수를 여기에 몰아넣었다. 선술했듯 함정 근무자가 전무하다시피하여 함정 운용에 도움이 안 되는 대신 육전에는 익숙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 탓에 해병대에는 해군에 비해 유달리 (악습이나 은어 등) 구 일본군 해군의 잔재가 많이 남아 현재까지 골치를 썩인다. 이 문제는 대한민국 해병대/악습 문서 참조.

10. 일본 해군 항공대



일본군은 항공모함 등의 이유로 항공부대를 운용했다. 1904년에 최초 기안이 검토됐고 풍선을 운용하는 육군과 달리 해군은 정찰이 필요하단 이유로 1912년에 해군항공기술연구회가 설치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2,900대의 항공기를 운용했다.

11. 일본 해군이 보유했던 군함 목록




기타 함선은 해당 문서 참조.

12. 참전 이력


메이지 덴노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고 보신전쟁부터를 기점하여 일본제국 해군 참전이력이다.
보신 전쟁(戊辰戦争)1868년~1869년
┗아와 해전(阿波沖海戦)
┗미야코 해전(宮古湾海戦)1869년 5월 6일
사족반란(士族反乱)1874년 2월 ~ 3월, 1876년 10월 ~ 12월, 1877년 2월 ~ 9월
사가의 난(佐賀の乱)1874년 2월 1일 ~ 3월 1일
세이난 전쟁(西南戦争)1877년 1월 29일 ~ 1877년 9월 24일
타이완침략(臺灣侵略)1874년 5월
청일 전쟁(日清戦争)1894년 7월 25일 ~ 1895년 11월 30일
풍도 해전(1894년)
황해 해전(1894년)
웨이하이 전투(1895년)
을미 전투(1895년)
러일전쟁(日露戦争)1904년 2월 8일 ~ 1905년 9월 5일
┗여순항 봉쇄작전(旅順港閉塞作戦) 1904년 2월 8일
┗여순항 해전(旅順口攻撃)1904년 2월 8일
┗제물포 해전(仁川沖海戦)1904년 2월 9일
┗황해 해전(黄海海戦)1904년 8월 10일
┗울산 해전(蔚山沖海戦)1904년 8월 14일
┗코르사코프 해전또는 소야 해전(コルサコフ海戦, 宗谷沖海戦)1904년 8월 20일
┗쓰시마 해전또는 일본해 해전(対馬沖海戦, 日本海海戦)1905년 5월 27일
제1차 세계대전
┗수송호위임무
중일 전쟁
┗충칭 대공습(重慶爆撃)1938년 2월 18일
┗난창 전투(南昌作戦)1939년 5월 9일
┗난징 전투(南寧作戦)1939년 11월 15일
┗쿤륜관 전투(崑崙関の戦い)1939년 12월 17일
┗빈양 작전(賓陽作戦)1940년 1월 28일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
┗진주만 공습(真珠湾攻撃)1941년 12월 7일
┗말레이 해전(マレー沖海戦)1941년 12월 10일
┗뉴기니 해전(ニューギニア沖海戦)1942년 2월 20일
┗발릭파판 해전(バリクパパン沖海戦)1942년 1월 24일
┗엔도우 해전(エンドウ沖海戦)1942년 1월 27일
┗자와 해전(ジャワ沖海戦)1942년 2월 4일
┗다윈 공습(ダーウィン空襲)1942년 2월 19일
┗발리 해전(バリ島沖海戦)1942년 2월 20일
┗수라바야 해전(スラバヤ沖海戦)1942년 2월 27일
┗바타비야 해전(バタビア沖海戦)1942년 2월 28일
┗스리랑카 해전(セイロン沖海戦)1942년 4월 5일
┗피낭 해전(ペナン沖海戦)1945년 5월 16일
┗산호해 해전(珊瑚海海戦)1945년 5월 4일
┗비스마르크해 해전(ビスマルク海海戦)1943년 3월 2일
┗지야푸라 전투(ホーランジアの戦い)1944년 4월 22일
┗타케이치 선단(竹一船団)1944년 4월 17일
┗비악섬 전투(ビアク島の戦い)1944년 5월 27일 8월 20일
┗혼작전(渾作戦)1944년 6월 2일 ~ 13일
┗미드웨이 해전(ミッドウェー海戦)1942년 6월 5일
┗제1차 솔로몬 해전(第一次ソロモン海戦)1942년 8월 8일
┗이오섬 전투(硫黄島の戦い) 1945년 2월 19일
┗텐고 작전(坊ノ岬沖海戦)1945년 4월 7일

13. 관련 문서


[1] 같은 욱일기이지만 중심의 태양 모양이 왼쪽에 살짝 치우친 점에서 육군기와 다르다. 그리고 이 깃발은 해상자위대에 계승되어 현재도 사용된다.[2] 육상자위대도 욱일기를 쓰지만 뻗어나가는 빛줄기가 8개짜리인 8조(条) 욱일기고, 해상자위대는 일본군 시절의 16조를 그대로 이어서 쓴다.[3] 이런 해군 특유의 귀족주의 현상은 일본의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1인당 소득은 다소 처지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해군에 투자를 좀 한 나라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쪽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4] 반면 육군에서는 학력과 성적은 일절 관계 없이 모두가 똑같이 개 같은 취급을 받았다. 장교들은 출신학교에 따라 인맥을 타느라 계급에 영향이 있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능력이 중시되었고, 하사관들도 장교 진급이 가능했다. 또 이렇게 진급한 하사관들은 장교들과 계급상 규정된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비육사라고 암암리에 무시되는 건 장교들 사이에서 마찬가지긴 했다. 게다가, 비전투병과 장교의 질과 대우는 해군이 앞서 언급한 이유로 훨씬 좋았다.[5] 사실 러일전쟁 이래 일본의 병참 능력은 진보하는 축이었다. 당장 해외시장에서 사오거나 영미의 지원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해야 했던 러일전쟁 즈음과 달리 어지간한 장비는 훨씬 대규모로 대량생산이 가능했고, 보급의 범위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넓어지기는 했다.[6] 사실 말 그대로 원론적 관점에서 보급을 무시하는 나라는 거의 찾기 어렵다. 오늘날 북한조차도 일반인들에 비해 군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의복이나 식량 등의 지원을 해주려는 경향을 보인다. 아니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군인들은 소속국의 일반적인 국민들에 비해 대부분 실제로 잘 먹었고 또 잘 먹어야 했다. 문제는 그러한 보급을 적시적소에 수행하는 노하우다.[7] 미 해군과 일 해군의 관계는 오늘날 우주개발로 따지면 NASA와 중국 국가항천국의 관계와 닮았다. 사실 후자는 전자에 비하면 노하우나 예산, 역사 등에 꽤나 밀린다. 근데 중국 국가항천국은 전세계 3위에 해당하는 우주기술을 보유한 집단이다. 1위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3위를 과연 무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일본 해군이 그들의 적이나 현대 해전사에서 미친 영향은 오히려 우주개발사에서 중국 국가항천국 따위는 무시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일 해군의 무능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따지고 보면 미 해군에 비교했을 때의 상대적 무능이라고 볼 수 있다. 근데 미 해군은 대략 1943-44년부터 항모를 스팸처럼 찍어내던 시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인류의 해군과 싸우라고 있는 조직이 아니다.[8] 어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한국의 노량진 같은 곳.[9] 현재의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현 남동부를 지배한 곳으로 당시 현 야마구치현 인근을 중심으로 한 조슈 번(나가토국)와 함께 일본 정치,군사쪽에서 강세를 보인 세력으로도 유명함. 이곳을 다스리던 가문이 그 유명한 시마즈 가문이다.[10] 진한글씨는 해상이 없는 행정구역 [11] 아리아케 만을 제외한 미야자키 현의 해상 [12] 무나카타군 및 온가군, 이동해상 [13] 제2 해군구에 포함되지 않은 해상 [14] 미야자키현의 해상의 가운대 아라아케만포함 [15] 당시의 사명은 '일본광학'이었다.